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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위기는 '수신제가'뿐 아니라 '치국평천하'에도 기인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그는 민심 안정보다는 한미일 연대에 더 치중했다. 한일 군사협력을 위해 식민지배문제와 독도 등에서 민심을 거스르는 모습은 그가 무엇을 우선시하는지를 증명했다.
그는 민심보다 동맹에 의존해 리더십을 강화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믿었던 동맹관계는 지금 불안정하다. 자민당의 위기 속에 기시다 후미오가 퇴진하더니, 이시바 시게루마저 총리 선출 26일 만에 총선 참패를 당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까지 투입했지만, 총알을 뚫고 나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당해내지 못했다.
윤 대통령이 미일 정상과 환하게 변동금리대출 웃는 모습을 보면서 '외교를 잘한다'며 지지해 준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다시 봐야 할 상황이 조성됐다. 15일 페루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3국 협력을 새로운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한미일 협력 사무국도 설치하기로 했지만, 바이든 때 했던 것을 트럼프와도 하려면 돈부터 찔러주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윤 대통령보다 동맹에 더 많이 의존해 농협학자금대출시간 야 했던 지도자는 이승만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의 지지를 기반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데 비해, 1948년 정부수립 당시 이승만에게는 그만한 당이 없었다.
그해 7월 국회에서 열린 대선 때 그를 밀어준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다음 달 내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멀어져갔고, 대한국민당이 그의 지지하에 그해 11월 창당됐지만 이 당은 주택담보대출 방공제 집권당이라 부를 만큼 그와 밀착되지 못했다. 이 당은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210석 중 24석밖에 얻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의 여당인 자유당은 1951년 창당됐지만, 당 내부를 수습하며 집권당 면모를 갖춘 것은 이기붕 체제가 자리 잡은 1953년 무렵이다.
한국을 떠난 지 33년 만인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미군 군복차림 인천파산신청 으로 김포공항의 미 군용기에서 나온 이승만은 미국의 전폭 지원 속에서도 자신의 여당을 신속히 갖추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출신들과 몽양 여운형이 해방 직후의 짧은 기간에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조직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것과 대비된다. 이승만의 역량 부족은 그가 미국에 더욱 의존하는 요인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대미 의존도가 너무 심한 무상담대출 나머지 어떤 때는 미국에 필사적으로 맞서기도 했다는 점이다. 미국이 아니면 기댈 데가 없으므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약해질 것 같으면 계급장 떼고 대드는 못한 모습을 곧잘 보여줬다.

이승만과 윌리엄 레이시의 갈등










▲  1955년 5월 14일 자 <조선일보> 기사 "레이시 미대사, 신임장 제정"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를 잘 반영하는 것이 제3대 주한미국대사인 윌리엄 레이시와의 갈등이다. 1955년 5월 14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 "신임 주한미대사 윌리암 S.B. 레이시 씨의 신임장 제정식은 13일 상오 9시 경무대 관저에서 거행"됐다고 적혀 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신임장을 이승만에게 제정함으로써 직무가 개시된 레이시 대사는 이로부터 불과 5개월 뒤에 사임했다. 그해 10월 16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건강상 이유"로 사임한 사실이 14일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공식 사임 이유가 된 건강 문제는 위장병이었다. 위 기사는 "레이시 대사는 지금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위장병으로 신음하여 왔다"고 전했다. 위장병으로 사임한다는 레이시의 말은 어찌 보면 과장이고 어찌 보면 진실이었다.
사임의 최대 이유는 위장병이 아니었지만, 그 '최대 이유'가 위장병 악화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위가 좋지 않은 그를 신경과민으로 만들어 위장병을 악화시켰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레이시가 신임 주한대사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부임 5개월 전인 1954년 12월이다. 이승만의 3선 연임을 위한 불법 개헌인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레이시가 새로운 주한대사로 주목을 받았다. 그해 12월 17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UP통신(훗날의 UPI) 기사는 "15일 탐문된 바에 의하면 외교관 윌리엄 S.B. 레이시 씨가 신(新)주한대사로 고려되고 있다 한다"고 보도했다.
의회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1952년에 국회 간선제를 피하고자 전쟁 와중에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켜 재선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 불안정을 극대화시켜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적신호가 켜지게 했다.
이때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미 합동참모본부와 함께 이승만 제거를 검토했다는 점은 학계 연구 결과 등을 통해 알려져 있다.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 내의 움직임은 한국전쟁 휴전 직전에도 있었다. 그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냉전구도에 훼방이 됐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민심 이반을 가중시키는 돌출 행동을 할 때면 미국 쪽의 태도가 곧잘 변하곤 했다. 1952년에는 미국의 영향하에 있는 유엔한국부흥위원단이 항의 성명을 전달했다.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대해 한층 더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3선개헌으로 인해 민심이 더 이반된 1954년 12월에 미국이 주한대사를 교체할 움직임을 보였으므로, 그가 이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일










▲  1955년 5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이 레이시 주한 미국대사의 신임장제정식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 한국정책방송원




레이시는 1953년 필리핀 대선을 앞둔 1952년부터 필리핀 대리대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미국이 필리핀에 대해 희망한 것은, 1946년 자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사실상 신식민지 상태에 놓인 이 나라를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할 대리인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는 자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저항하는 인민해방군(항일세력 출신)의 저항을 손쉽게 분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 의도로 미국은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보다 온건한 이미지를 풍기는 친미파 라몬 막사이사이를 급부상시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1989년 4월 <경제와 사회>에 실린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논문 '필리핀과 미국: 온정적 제국주의와 자선적 동화정책의 실상'은 "(미국은) 만약 막사이사이가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쿠데타를 감행할 목적으로 마닐라 앞바다에 미 구축함을 대기시키고 비상상태에 들어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이 필리핀 대리인을 교체하고자 노골적인 공작을 펴던 기간에 현지에서 활약한 인물이 레이시다. 3선 개헌으로 또다시 대형사고를 친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레이시가 후임 대사로 거론되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다. 2007년에 <정신문화연구> 제30권 제2호에 실린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레이시가 3대 대사로 부임하자 '미국이 이 박사를 물러나게 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레이시는 필리핀에서처럼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 들어온 첫날부터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거대한 힘을 맞닥트려야 했다. 1978년 6월 14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가 입국하던 날 한국 외무부의 박동진 의전국장은 레이시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건널 때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공항이 아닌 한강 다리 위에서 한국 외교부 당국자가 미국 대사를 영접했던 것이다. 시간이 어긋나 생긴 일이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외교적 불상사인 것은 분명했다.
레이시의 고초는 계속됐다. 한국 관료들은 그를 기피했다. 그래서 정치담당참사관이 그의 역할을 대신했다. 어느 정치인은 그에게 너무 노골적인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귀하는 이 박사를 물러나게 하기 위해 한국에 부임했다는데 사실이냐"라는 질문까지 있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은 레이시를 정신없이 만들 대형 폭탄을 준비했다. 레이시 부임 2개월 뒤에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들에 세금 폭탄을 때렸다. 레이시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위 이완범 논문은 이것이 레이시 부임에 대한 그의 항의였다고 설명한다. 결국 레이시는 그해 10월 '위장병 신음'을 이유로 대사직을 사임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제거할 계획을 갖고 왔을지도 모르는 레이시를 압박해 부임 5개월 만에 내쫓았다. 이는 외형상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승리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상은 미국에 대한 그의 의존도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승만이 국내 기반이 든든해 믿는 구석이 있었다면 미국이 의심을 받을 만한 대사를 보내기도 힘들었겠지만, 이승만 자신도 그렇게까지 반응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위장 약한 레이시의 신경과민을 자극한 이승만의 행동은 그가 민심보다 동맹에 더 의존했음을 유별나게 증명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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